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민족과 국가의 수호 및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한 국가 추념일이자 법정공휴일이다. 또한 6월을 호국 보훈의 달로 불리게 한 상징성을 가진 날이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현충일 노래 가사이다.
현충일을 왜 6월 6일로 지정했을까?
1948년 5월 10일, 2년 임기의 제헌 국회의원(200석) 선거로 16개 정당에서 115석을 차지했고 무소속이 85석을 가져갔다. 제1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석, 제2당은 한국민주당 29석, 제3당 대동청년당 12석으로 3당의 합이 96석으로 과반의석이 안됐다.
1948년 9월 7일, 재헌국회는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반민족행위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일제청산을 추진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 40여명을 동원하여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해 친일 청산을 할 수 없도록 초법적으로 강제로 해산시켰고, 20일 후인 6월 26일, 우리의 민족지도자이고 상해임시정부 수반을 지낸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 중대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김구 선생의 첫 제삿날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2일 후 6월 27일, 대전으로 도망친 이승만은 라디오 특별방송으로 서울시민에게 동요하지 말라는 가짜 방송을 한 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교를 폭파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에 서울시민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학살하고 자손들에게는 연좌제까지 실시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을사 5적이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것 처럼 대한민국의 군사주권을 미국에 바쳤다.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간의 전쟁을 중지하는 휴전협정에 이승만은 당사국 대표로 참여하지 못했고, 당시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웨인 클라크, 북한군 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서명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3년 후인 1956년 4월에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일제청산을 정지시킨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여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날을 보훈을 상징하는 현충기념일로 바꾸어 자신의 치부를 현대사에서 지우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5년 12월, 현충일로 명칭을 변경한 후 법정기념일로 확정하여 이승만이 일제청산을 저지시킨 그날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을 기리는 숭고하고 엄숙한 날로 현대사를 바꿔놓았다.
현충일 유래가 1956년 6월 6일 (제1회 현충일)은 모내기를 시작하는 망종(芒種)일로 선조들이 좋은 날로 여겨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며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인 6.25 전쟁의 발발 시점이 1950년 6월이었기 때문에 6월의 적당한 날을 골라서 6월 6일로 정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1949년 6월 6일은 일제청산을 위해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경찰 40여명을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킨 통한의 날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부끄러운 사건으로 ‘반민특위습격사건’이라 부른다.
친인 매국노와 쿠데타세력에 의해 자신들의 치부를 대한민국 역사에서 완벽하게 지우는 정책으로 통한의 날을 현충일로 덧씌워 역사에서 잠시 감출 수는 있겠지만 사실을 영원히 지울 수는 없다.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때가 되면 밝은 세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현충원에 고이 잠든 독립운동 애국지사 호국영령은 통한의 날인 현충일이 오면 얼마나 속이 터질까?